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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부르심과 택하심 - 1

by 꾸돼지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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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지난주까지 베드로 전서 본문을 함께 보았다.

이번 주부터는 베드로 후서를 진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베드로후서 1장 1-11

 

 

베드로후서의 목적 -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

 

기독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개개인이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의해 동일한 말씀도 얼마든지 쉽게 자기화된 해석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개인의 환경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교리라는 것이 존재하며, 말씀은 엄격하게 모두가 인정하는 해석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개인의 탁월함에 기대어 해석한 말씀과 그 해석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모인 것을 우리는 이단이라고 한다.

 -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개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베드로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자신의 순교가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남겨질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간절한 권면과 경고를 전하기 위해 기록된 서신이다. 일종의 '고별 설교' 또는 '유언'과 같은 성격을 띤다.

당시 교회에 침투한 '초기 영지주의'적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 이 서신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당시 교회에 침투한 이단적 가르침은 아래와 같다. - Gemini

 - 영과 육의 이원론 및 윤리적 방종 : 금욕주의와 윤리적 방종으로 나타나는 극단적 윤리적 태도

 -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지식 강조 : 구원이 믿음이나 행위가 아닌, 특별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

 

 

왜 기독교에 이단이 발생하게 될까?

 

성경은 하나님을 안내하는 것이지 세상에 대한 백과사전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신비로부터 시작된 종교이므로 성도들이 해석할 수 없는 수많은 내용이 있다.

이는 성도가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성경을 완전히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구원에 충분한 만큼 성경을 통해 말씀을 전달하셨지,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백과사전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종교'에 대한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성도가 죄책을 갖고, 그 죄에서 자유로움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렇다면 봉사의 대상은 온전히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귀속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귀속된다.

왜 교회가 세상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나 역시 이 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분명 기독교는 세상과 반대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 교회는 하나님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지 간디나 부처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에 무언가를 하나님께 보상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창조주인 하나님을 잊고 살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성도들을 피로 사셨다.

하나님이 이러한 행위를 하신 이유는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해 죄책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받으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구원과 성화의 과정에서 모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고, 그 반응은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에 좌우될 수 있다.

인간적인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며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단은 구원과 성화의 과정 모두가 인간적인 이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인간적인 보상을 하길 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부족한 이해 위에서 시작된다.

 

지극히 당연한 심리적인 과정인 동시에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기본으로 돌아가야 대비할 수 있는데, 나는 참 그게 어렵다.

주기적으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한 올바른 관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읽고, 내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진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삶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길이다...

몸이 피곤해서, 아파서, 집안에 일이 있어서, 회사에 일이 있어서... 수많은 핑계들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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